부기 나이트(1997): 찬란한 불빛 아래 길 잃은 영혼들의 씁쓸하고 아름다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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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왠지 모르게 70년대의 그 끈적하고 화려한 공기가 그리워져서 정말 오랜만에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부기 나이트’를 다시 꺼내 봤어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과 여운이 아직도 생생한데, 다시 보니 또 다른 감정들이 밀려오더라고요. 단순히 포르노 산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떻게든 가족을 만들고 소속감을 느끼려 했던 길 잃은 사람들의 찬란하고도 서글픈 초상화라는 생각이 더 깊게 들었어요.

영화는 1977년, 캘리포니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시작해요.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접시닦이로 일하는 17살 소년 에디. 그에겐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아주 특별한 재능(?)이 있었죠. 포르노 영화계의 대부인 잭 호너 감독은 우연히 에디를 발견하고 그의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봐요. 그렇게 에디는 ‘덕 디글러’라는 예명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영화는 덕 디글러가 순식간에 업계 최고의 스타로 떠오르는 과정과, 그 화려함 뒤에 서서히 드리워지는 몰락의 그림자를 아주 집요하고도 스타일리시하게 따라가요. 시대가 필름에서 비디오로 넘어가고, 마약과 끝없는 파티가 일상이 되면서 이들이 만들어낸 위태로운 유토피아는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하죠.

제가 이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이유는,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코 인물들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이들을 그저 ‘포르노 배우’가 아니라, 저마다의 상처와 결핍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봐요. 잭 호너(버트 레이놀즈)는 배우들을 자식처럼 아끼며 예술적인 포르노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이상주의자이고, 앰버(줄리앤 무어)는 약물 중독과 방탕한 생활 때문에 아들의 양육권마저 뺏긴, 모성애에 굶주린 인물이죠. 그 외에도 늘 어딘가 짠한 스코티(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순진한 롤러걸(헤더 그레이엄)까지, 모두가 정상적인 사회에서 밀려나 이곳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엉성하지만 따뜻한 유사 가족을 형성해요. 그들의 파티 장면을 보고 있으면 즐겁고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건, 이 행복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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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연출은 정말이지 감탄스러워요. 특히 오프닝 시퀀스의 롱테이크는 전설적이죠. 카메라가 나이트클럽 안을 유려하게 헤집고 다니며 주요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는데, 단 몇 분 만에 관객을 1970년대의 그 현란한 세상 속으로 완벽하게 빨아들여요. 감독은 현란한 조명과 과감한 색감,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를 통해 인물들의 들뜬 감정과 시대의 흥분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 놓았어요. 그러다 영화 후반부, 80년대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어두워지는데, 이때의 연출 변화도 정말 탁월하더라고요. 화려했던 색감은 차갑게 변하고, 카메라는 인물들의 불안과 공허함을 집요하게 파고들죠. 마치 숙취에 시달리는 다음 날 아침처럼, 파티가 끝난 후의 쓸쓸함과 허무함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낸 것 같아요.

배우들의 연기는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예요. 이 영화로 생애 첫 오스카 후보에 오른 버트 레이놀즈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연기를 보여줬어요. 겉으로는 위엄 있는 감독이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가족’들이 흩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그려냈죠. 줄리앤 무어의 연기는 정말 가슴을 후벼 파요. 망가져가면서도 모성애를 놓지 못하는 앰버의 복잡한 심리를 스크린에 그대로 새겨 넣었어요. 그리고 젊은 시절의 마크 월버그! 순진한 소년이 세상의 쓴맛을 알아가는 과정을 순수함과 오만함, 그리고 처절함을 오가며 정말 인상 깊게 연기했어요. 이 외에도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돈 치들, 존 C. 라일리, 윌리암 H. 메이시 등 지금은 거물이 된 배우들의 풋풋하면서도 놀라운 연기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답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음악이에요. 70년대를 풍미했던 디스코, 펑크, 록 음악들이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데, 단순히 배경음악으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각 장면의 감정과 분위기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요. 특히 파티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Best of My Love’나, 덕 디글러가 성공 가도를 달릴 때 흐르는 ‘Machine Gun’은 듣기만 해도 어깨가 들썩일 정도죠. 반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 사용되는 나이트 레인저의 ‘Sister Christian’은 그 아이러니함 때문에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어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얼마나 음악을 잘 쓰는 감독인지 이 영화 한 편으로 증명되는 것 같아요.

‘부기 나이트’는 결국 꿈과 성공, 그리고 필연적인 몰락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화려한 조명 아래서 영원할 것 같던 파티는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죠. 하지만 영화는 그저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하며 끝나지 않아요. 모든 것을 잃고 갈 곳 없어진 덕이 다시 잭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서로를 말없이 끌어안아 줍니다. 실패하고 망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댈 곳이 있다는 것. 어쩌면 감독은 그 불완전한 유대와 용서 속에서 작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화려함의 극치와 몰락의 바닥을 2시간 반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롤러코스터처럼 경험하게 만드는, 정말이지 대단한 영화예요. 아직 안 보셨다면, 혹은 저처럼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으시다면 꼭 한번 시간을 내어 이 특별한 파티에 참여해 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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