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셋(2004): 9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시작된 우리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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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날이 있지 않나요? 문득 오래전 스쳐 지나간 인연이 생각나고, ‘그때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에 잠기는 날 말이에요. 저에게 ‘비포 선셋’은 꼭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랍니다. 전작인 ‘비포 선라이즈’에서 기차 안의 우연한 만남이 하루 동안의 낭만적인 사랑으로 피어나는 걸 보며, 저도 함께 설레고 또 함께 아쉬워했었거든요. 비엔나의 기차역에서 6개월 뒤를 기약하며 헤어졌던 20대의 제시와 셀린느. 그 약속은 과연 지켜졌을까요? 9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뒤, 영화는 파리의 한 서점에서 그 대답을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가 자신의 책 홍보를 위해 파리의 유서 깊은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찾았을 때, 그의 시선 끝에 한 여자가 머물러요. 바로 셀린느죠. 9년 만의 재회. 어색한 미소와 짧은 인사 속에는 그동안 서로에게 하고 싶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던 수만 가지 질문과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어요. ‘비포 선라이즈’가 풋풋하고 이상적인 20대의 낭만을 그렸다면, ‘비포 선셋’은 30대가 되어 현실의 쓴맛과 삶의 무게를 어느 정도 알게 된 두 남녀의 훨씬 더 깊고 현실적인 대화로 채워져 있더라고요. 제시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지만, 그의 눈빛 어딘가에는 공허함이 서려 있어요. 셀린느는 환경운동가로 열정적인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사랑에 대한 깊은 회의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죠. 그들이 파리의 거리를 걷고,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마치 바로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었어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두 사람의 ‘대화’ 그 자체인 것 같아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처럼, 두 배우가 자유롭게 파리의 풍경 속을 거닐며 끊임없이 대화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대화가 정말 지루할 틈이 없어요. 9년간 쌓아온 서로에 대한 그리움, 원망, 궁금증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거든요. 정치, 환경 문제 같은 사회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결혼 생활의 권태, 스쳐 지나간 연인들, 그리고 여전히 서로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그날의 기억까지. 특히 제시가 ‘그날 밤 이후 모든 여자는 너와 비교하게 됐다’고 고백하는 장면이나, 셀린느가 ‘사랑의 감정을 더는 느끼지 못할 것 같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고요. 이건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시간과 기억, 그리고 인생의 선택에 대한 아주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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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연기는 정말 ‘연기’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예요. 실제로 두 배우가 시나리오 작업에 직접 참여해서 그런지, 대사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실제 제시와 셀린느가 된 것 같았어요. 9년의 세월이 얼굴에 남긴 옅은 주름마저도 그들의 서사를 완성하는 중요한 일부가 되는 느낌이었죠. 영화는 제시가 공항으로 떠나야 할 시간까지, 딱 그 시간만큼 실시간으로 흘러가요.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두 사람과 함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센 강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 위에서, 파리의 노을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보며 ‘제발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더라고요. 비엔나의 낭만과는 또 다른, 파리의 성숙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두 사람의 감정선을 더욱 애틋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어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셀린느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시퀀스예요. 제시를 차로 데려다주던 셀린느는 자신의 아파트에 잠시 들르자고 제안하죠. 그 좁고 아늑한 공간 안에서, 셀린느는 수줍게 기타를 들고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러줍니다. ‘A Waltz for a Night’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비엔나에서의 하룻밤을 추억하는 가사로 채워져 있어요. 그 노래를 듣는 제시의 표정, 그리고 노래가 끝난 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 그 순간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 같았어요. 9년 동안 묻어두었던 진심, 서로를 향한 변치 않은 감정, 그리고 앞으로의 관계에 대한 희미한 희망까지도요. 이 장면의 여운은 정말이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요.

결국 영화는 관객에게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 않아요. 제시가 비행기를 타러 갔는지, 아니면 남았는지. 하지만 그 유명한 마지막 대사, ‘Baby, you are gonna miss that plane.’이라는 제시의 말에 ‘I know.’라고 나지막이 답하는 셀린느의 미소는, 그 어떤 해피엔딩보다 더 완벽한 결말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 같아요. 늘 명확한 정답이 있는 건 아니고, 때로는 불확실함 속에서 용기를 내어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거죠. ‘비포 선셋’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쯤 있을 법한 ‘놓쳐버린 인연’과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영화인 것 같아요.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두 사람의 다음을 궁금해했던 분이라면, 이 영화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될 필견의 작품이에요. 그리고 혹시 전편을 보지 않았더라도 괜찮아요. 이 영화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깊은 울림과 감동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30대의 문턱을 넘었거나, 지나온 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계신 분이라면 더욱 깊이 공감하며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 수다를 떤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였어요. 해가 저물기 전, 그 짧은 오후의 마법 같은 시간을 여러분도 꼭 함께 느껴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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