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상미에 완전히 반했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너무 피곤했지만, 이 영화만큼은 꼭 보고 싶었습니다. 막상 재생 버튼을 누르니 피곤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느새 영화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더라고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만약 우리의 시간이 반대로 흐른다면, 삶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요. 어른으로 태어나 점점 아이가 되어가는 삶. 상상만으로는 어쩐지 낭만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오늘 이야기할 영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바로 그 상상을 스크린 위에 너무나도 아름답고 애틋하게 그려낸 작품이에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그 먹먹함과 여운이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있을 정도랍니다.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 80세 노인의 외모를 가진 아기가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해요. 벤자민(브래드 피트)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흉측한 외모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에게 버림받게 되죠. 차가운 계단 위에 버려진 아기를 발견한 건 양로원에서 일하는ใจดี한 퀴니(타라지 P. 헨슨)였어요. 모두가 괴물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퀴니는 신의 아이라며 그를 아들로 받아들여요. 그렇게 벤자민의 기묘한 삶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인 양로원에서 시작됩니다. 겉모습은 쇠약한 노인이지만, 내면은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어린 아이. 그 부조화 속에서 벤자민은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기 시작하더라고요.
양로원이라는 공간은 참 상징적인 것 같아요. 모두가 삶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그곳에서, 벤자민만이 유일하게 삶의 시작을 향해 나아가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삶에 한 줄기 빛처럼 한 소녀가 나타나요. 할머니를 만나러 온 예쁜 소녀, 데이지(케이트 블란쳇). 쭈글쭈글한 노인의 모습을 한 벤자민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친구로 다가와 준 유일한 아이였죠. 한밤중에 식탁보를 덮고 촛불 아래서 둘만의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인 것 같아요. 서로 다른 시간의 방향을 가진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되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어요.

이 영상미에 완전히 반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벤자민은 점점 젊어지고, 데이지는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해요. 벤자민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 선원이 되기도 하고, 전쟁을 겪기도 하며 자신만의 인생을 채워나가요. 데이지는 뉴욕에서 촉망받는 발레리나가 되고요. 서로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들은 편지를 통해, 그리고 가끔의 만남을 통해 서로를 향한 마음을 놓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의 시간은 계속해서 엇갈리기만 하죠. 그가 청년의 모습을 갖췄을 때 그녀는 아직 어렸고, 그녀가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시기엔 그는 여전히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서로를 사랑하지만, 함께할 수 없는 시간의 간극이 보는 내내 어찌나 안타깝던지요.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한가운데서 두 사람의 시간이 기적처럼 만나는 순간이 찾아와요. 벤자민은 40대의 가장 멋진 모습으로, 데이지 역시 인생의 가장 성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회하게 되죠. 드디어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 거예요. 이 시기가 두 사람에겐 가장 행복하고 찬란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시간은 멈추지 않죠. 이 완벽한 순간은 영원할 수 없었어요. 벤자민은 계속해서 젊어지고, 데이지는 서서히 나이가 들어가기 시작하니까요. 이 영화가 단순한 판타지 로맨스를 넘어 깊은 울림을 주는 건 바로 이 지점 때문인 것 같아요. 가장 행복한 순간에조차, 다가올 이별을 예감해야만 하는 그들의 사랑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왔어요.
데이비드 핀처 감독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세븐’, ‘파이트 클럽’ 같은 날카롭고 서늘한 스릴러의 대가로 알려진 그가 이렇게 서정적이고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냈다는 게 처음엔 좀 놀라웠어요. 하지만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특유의 정교하고 세밀한 연출력이 곳곳에 녹아있더라고요. 한 남자의 80년 인생을 거의 3시간에 달하는 시간 동안 펼쳐내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오히려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힘은 정말 대단했어요. 특히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죠. CG의 도움을 받았지만, 단순히 기술에 기댄 것이 아니라, 노인부터 아이까지 한 인간의 내면을 눈빛과 표정으로 고스란히 담아냈어요. 두 배우의 케미스트리는 이 영화를 단순한 ‘설정’이 아닌, 진짜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인 것 같아요.
결국 벤자민은 어린 아이가 되고, 기억을 잃어가는 아기가 되어 데이지의 품에 안겨 생을 마감해요. 모든 것을 잊고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벤자민을 돌보며, 데이지는 그들의 사랑을 추억하죠. ‘잘 자, 벤자민’이라고 속삭이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정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인생의 방향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결국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하고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 서로를 마주 보고 사랑하는 이 찰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영화였어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단순한 영화를 넘어, 삶과 죽음, 사랑과 시간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이에요. 누군가에게는 인생 영화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긴 여운으로 남을 거라고 확신해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혹은 다시 한번 그 감동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오늘 저녁 이 특별한 시간 여행에 동참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우리의 유한한 삶 속에서 무엇이 정말 소중한 것인지,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