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오랜만에 제 가슴을 뛰게 하는 조합의 영화 소식을 들었어요. 스파이크 리 감독과 덴젤 워싱턴. 이 두 이름이 한 영화에 함께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저 같은 영화 팬에게는 거의 축제나 다름없거든요. 두 사람이 함께했던 ‘말콤 X’나 ‘인사이드 맨’ 같은 영화들은 아직도 제 인생 영화 목록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천국부터 지옥까지’라는 제목의 신작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큰 기대를 품었는지 몰라요. ‘이번엔 또 어떤 엄청난 걸작이 탄생했을까?’ 하는 설렘으로 극장으로 향했던 것 같아요.
영화는 화려함의 정점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해요. 음악계의 거물, 그야말로 ‘천국’에 사는 듯한 인물이죠. 돈, 명예, 권력,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까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그의 삶에 어느 날 갑자기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더라고요. 바로 몸값을 노린 음모에 휘말리게 되면서부터예요. 영화는 이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 즉 가족과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유산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과정을 따라가요. 성공의 최정점에서 한순간에 생사를 넘나드는 ‘지옥’의 문턱까지 떨어지게 된 남자. 그가 마주하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잔인하게 그려져요.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우선 덴젤 워싱턴의 연기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아요. 사실 이 영화의 많은 아쉬움 속에서도 유일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가 바로 그의 연기였던 것 같아요.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오만함과 여유로움부터,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남자의 절망과 공포,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독해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분노까지. 그야말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인물의 내면을 스크린에 완벽하게 옮겨놨더라고요. 특히 그의 눈빛 연기는 정말 압권이었어요. 대사 한마디 없이도, 그저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만으로 주인공이 느끼는 고뇌와 슬픔, 결단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아마 덴젤 워싱턴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의 평범한 서사는 더더욱 힘을 잃었을지도 몰라요. 그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끝까지 지켜볼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역시 덴젤 워싱턴이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의 아쉬움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덴젤 워싱턴이라는 거대한 배우가 온몸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데, 정작 영화의 다른 요소들이 그를 제대로 받쳐주지 못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특히 스파이크 리 감독의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어요. 사회적 메시지를 날카롭게 담아내던 그의 장기가 이번 스릴러 장르와는 어딘가 겉도는 느낌이었달까요. 긴박감이 터져 나와야 할 장면에서는 오히려 호흡이 늘어지고, 인물의 감정선에 깊이 몰입해야 할 순간에는 불필요한 장면들이 끼어들면서 흐름을 툭툭 끊어버리는 것 같았어요. 범죄 스릴러가 가져야 할 쫀득한 긴장감보다는, 다소 산만하고 정돈되지 않은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거장도 때로는 길을 잃는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까요. 스파이크 리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실망감이 꽤 컸습니다.

덴젤 워싱턴과 함께 호흡을 맞춘 제프리 라이트나 일페네쉬 하데라 같은 배우들의 역할도 아쉬움이 남아요. 제프리 라이트는 정말 좋은 배우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만한 역할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주인공의 조력자인지 감시자인지 모호한 위치에 머무르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하기보다는 주변을 맴도는 역할에 그친 느낌이었어요. 주인공의 아내 역을 맡은 일페네쉬 하데라의 캐릭터 역시 평면적으로 그려져서 안타까웠어요. 위기 상황 속에서 남편과 함께 고뇌하고 갈등을 겪는 입체적인 인물이기보다는, 전형적인 ‘피해자’ 혹은 ‘조력자’의 기능적인 역할에만 머무른 것 같아 보였거든요. 배우들 간의 연기 시너지가 조금 더 폭발적으로 일어났다면, 영화의 몰입감이 훨씬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 즉 ‘가족과 유산을 지키기 위한 선택의 무게’라는 주제 자체는 굉장히 묵직하고 좋았어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잖아요. 특히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극한의 상황이라면, 과연 도덕과 현실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영화는 이 근원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려고 노력해요. 하지만 그 질문을 풀어가는 방식이 너무 작위적이거나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주인공이 겪는 딜레마의 깊이에 비해, 그를 둘러싼 사건들의 개연성이 떨어지다 보니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감정 이입보다는 ‘저 상황에서 저런다고?’ 하는 의문이 먼저 들게 되더라고요. 좋은 재료들을 가지고도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어내지 못한, 어딘가 아쉬운 레시피의 영화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음악계 거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인 만큼, 사운드트랙에 대한 기대도 컸는데요. 이 부분 역시 조금은 평이했던 것 같아요. 영화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고조시키거나 인물의 감정을 대변하는 인상적인 음악이 있었다기보다는, 장면의 배경처럼 무난하게 흘러가는 느낌이었어요.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들이 종종 강렬한 음악으로 관객의 귀를 사로잡았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아쉬운 지점이었죠. 오히려 인상적이었던 것은 촬영 기법이었어요. 인물의 불안한 심리를 담아내기 위한 핸드헬드 촬영이나, 도시의 차가운 풍경을 담아낸 미장센 등은 분명히 인상적인 구석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기술적인 장점들이 삐걱거리는 서사를 완전히 구원해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천국부터 지옥까지’는 스파이크 리와 덴젤 워싱턴이라는 두 거장의 이름값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은 내려놓고 봐야 하는 영화인 것 같아요. 덴젤 워싱턴의 명불허전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팬이라면 한 번쯤 볼만하지만, ‘인사이드 맨’ 같은 촘촘하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를 기대했다면 분명 실망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마치 최고의 재료들을 모아놓고 정작 가장 중요한 ‘조화’를 놓쳐버린 요리처럼, 각 요소들이 겉돌며 아쉬움을 남겼어요. ‘천국’ 같은 기대를 품고 극장을 찾았다가, ‘지옥’까진 아니더라도 어딘가 미지근한 ‘연옥’에 머물다 나온 기분이랄까요. 그래도 덴젤 워싱턴의 연기가 주는 감동만큼은 확실했기에, 아주 최악의 선택은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