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까지 긴 여운과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 작품이 있었나 싶어요. 상영관을 나선 후에도 며칠 동안이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그 장면과 소리들이 떠오르게 만드는 영화. 오늘은 바로 그런, 어쩌면 올해 가장 문제적이면서도 반드시 봐야 할 작품일지도 모를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좀 길게 나눠볼까 해요.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영화들을 봐왔어요. 보통 그런 영화들은 수용소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관객의 감정을 끌어내곤 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어요.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담장 바로 옆,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을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그곳에는 수용소장인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에델)와 그의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 그리고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다섯 아이들이 살고 있어요. 그들의 일상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목가적이에요. 헤트비히는 정원을 가꾸는 일에 온 마음을 쏟고, 아이들은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정원을 뛰어다니며 웃음꽃을 피우죠. 남편은 출퇴근하며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강가로 소풍을 떠나기도 해요. 이 모든 풍경은 마치 잘 만들어진 가족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아요. 너무나 완벽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죠.
하지만 이 완벽한 일상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존재해요. 바로 ‘소리’입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배우나 스토리가 아니라, 어쩌면 이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화면은 온통 푸른 정원과 따스한 햇살,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 차 있는데, 우리의 귀에는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비명, 간헐적인 총성, 기차가 멈추고 사람들이 내리는 소리, 소각로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음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파고들거든요. 영화 속 인물들은 이 끔찍한 소음들을 마치 배경 소음처럼, 혹은 귀뚜라미 소리처럼 완벽하게 무시하고 자신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합니다. 이 극단적인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의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불안감과 심리적 압박은, 그 어떤 잔인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보다도 훨씬 더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고 힘들게 만들더라고요. 감독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가장 지독하고도 영리한 방식을 택한 거죠.

이러한 연출 방식은 영화의 촬영 기법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요. 카메라는 대부분 고정된 위치에서, 마치 그 집안 곳곳에 설치된 CCTV처럼 인물들의 감정선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그들의 일상을 관찰해요. 핸드헬드나 극적인 클로즈업 같은 기법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관객으로서 그들의 삶에 동화되거나 감정적으로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유령처럼 그들의 공간을 맴돌며 그들이 어떻게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지를 목도하게 되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의 다채로운 색감과, 그 너머로 보이는 수용소 건물의 삭막한 회색빛의 대비는 시각적으로도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치였고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계산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보는 내내 감탄과 동시에 소름이 돋는 경험이었어요.
특히 아내 헤트비히를 연기한 산드라 휠러의 연기는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그녀는 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의 옷이나 물건들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와 사용하는 인물이에요. 담장 너머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와도,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는 새로 심은 라일락이 잘 자라는지, 남편의 승진으로 인해 이 ‘꿈의 낙원’을 떠나게 되지는 않을지 하는 것들뿐이죠.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녀의 ‘관심 영역(Zone of Interest)’ 밖의 일일 뿐, 그녀의 완벽한 세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해요. 그녀의 모습은 인간이 끔찍한 진실 앞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스스로를 기만하고,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정말이지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녀는 괴물 같은 악당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가정과 일상을 지키고 싶어 하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 공포는 배가되는 것 같아요.
남편인 루돌프 회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수십만 명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새로운 소각로 설계에 대해 동료들과 무미건조하게 회의하면서, 동시에 전화로 아이들에게는 다정한 아빠의 목소리로 동화를 읽어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줘요. 그에게 학살은 끔찍한 범죄가 아니라, 그저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에 불과합니다. 영화 후반부, 그가 계단을 내려가다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어쩌면 그가 애써 외면하고 억눌러왔던 인간성의 마지막 파편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크리스티안 프리에델은 이 감정 없는 관료주의적 악마를 너무나도 담담하게 연기해서, 오히려 광기 어린 악당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 같아요. ‘과연 나는 저들과 다른가?’ 하고요. 영화는 단순히 과거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할 수 있는 ‘외면’과 ‘무관심’이라는 악의 본질을 파고들어요. 우리는 우리 삶의 안락함과 평화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을 얼마나 외면하고 살아가는 걸까요? 스마트폰 뉴스피드에 잠시 떴다가 사라지는 전쟁과 기아 소식에 잠시 마음 아파하지만, 이내 나의 저녁 메뉴나 주말 약속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과 회스 부부의 모습이 과연 본질적으로 얼마나 다를까, 하는 불편한 질문을 피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선택적 무관심’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처럼 다가왔습니다.
결론적으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결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에요. 오히려 보는 내내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영화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인간 본성의 어두운 단면과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는, 대단히 지적이고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찾아오는 그 완벽한 암흑과 침묵의 순간, 그 순간의 무게가 영화의 모든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자극적인 장면이 아닌, 관객의 상상력과 양심을 자극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적 체험을 원하신다면, 이 영화를 꼭 한번 경험해 보시길 추천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