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그런 영화가 있잖아요. 할리우드의 억 소리 나는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눈물을 쏙 빼놓는 감동적인 드라마도 아닌데, 보고 나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 곱씹게 되는 영화요. 저에게는 리처드 쉥크만 감독의 ‘맨 프럼 어스’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어요. 정말 우연히, 아무런 정보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화려한 CG나 액션 장면 하나 없이, 오직 한정된 공간에서 오고 가는 ‘대화’만으로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입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아주 평범해요. 10년간 한 대학에서 존경받던 교수, 존 올드맨이 갑작스럽게 사직하고 이사를 준비하면서 이야기는 문을 열어요. 그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동료 교수들이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그의 집으로 모여들죠. 생물학자, 고고학자, 역사학자, 심리학자 등 각 분야의 전문가인 그의 친구들은 아쉬움을 표하며 왜 떠나는지 묻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 시작된 평범한 송별회는, 존이 아주 나지막하지만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던지면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해요. 바로 자신이 14,000년 전, 그러니까 크로마뇽인 시절부터 죽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고백이었죠.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진지한 그의 태도에, 동료들은 처음에는 황당해하지만 점차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관객인 우리 역시 그들의 지적인 탐험에 함께하게 되는 거예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지적 유희’에 있는 것 같아요. 존의 고백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 과학, 종교, 철학을 관통하는 거대한 질문의 시작점이 되더라고요. 그의 동료들은 각자의 전문 분야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의 주장에 논리적인 허점을 찾아내려고 애를 써요. ‘그 시대의 기후는 어땠나?’, ‘언어는 어떻게 배웠나?’,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난 적이 있나?’ 같은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지죠. 하지만 존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마치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대답을 이어갑니다.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의 빈틈을 파고들며, 때로는 우리가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의심을 품게 만들어요. 이 과정이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이나 추리 소설을 보는 것처럼 엄청난 긴장감과 흡입력을 만들어내더라고요.

존 올드맨을 연기한 데이빗 리 스미스의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14,000년이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그는 과장되지 않고 담담한 연기로 그 깊이를 완벽하게 표현해냈어요. 그의 눈빛에서는 모든 것을 겪어본 자의 초연함과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내야만 하는 영원한 이방인의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죠. 그의 차분한 목소리로 듣는 인류의 역사는, 딱딱한 연대기가 아니라 한 개인이 겪어온 생생한 경험담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리기보다는 오히려 이상하게 설득력 있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저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만약 저게 사실이라면?’이라는 가정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요.
영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요. ‘믿음이란 무엇인가?’, ‘지식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과연 완전한 진실일까?’ 특히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종교라는 민감한 영역을 건드리면서 논쟁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신념이 흔들릴 수도 있는 충격적인 가설 앞에서, 등장인물들은 격렬하게 저항하거나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죠.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자신의 지식과 믿음의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리고 그 틀이 깨졌을 때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어요. 영화는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요. 존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명확하게 밝히기보다는, 그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판단을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렇게 긴 여운이 남는 것이겠죠.
사실 이 영화는 제작비가 굉장히 적게 든 초저예산 영화로 유명해요. 영화의 배경은 거의 존의 집 거실 하나로 한정되어 있고, 등장인물도 10명이 채 되지 않죠. 하지만 ‘맨 프럼 어스’는 스펙터클한 볼거리나 자본의 힘이 좋은 영화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아주 좋은 예시라고 생각해요. 훌륭한 아이디어와 탄탄한 각본만 있다면, 벽난로의 타닥거리는 소리와 배우들의 목소리만으로도 우주를 여행하고 역사를 관통하는 엄청난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니까요. 이 각본은 SF의 거장인 제롬 빅스비가 무려 40년에 걸쳐 구상하고, 임종 직전에 완성한 이야기라고 하더라고요. 그의 마지막 지적 유산이라고 생각하니, 영화의 대사 하나하나가 더욱 소중하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아마 많은 분들이 친구나 연인과 함께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질 거예요. ‘너는 존의 말을 믿어?’, ‘만약 네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 와 같은 질문들을 던지면서요. ‘맨 프럼 어스’는 단순한 오락거리 이상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입니다.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영화인 것 같아요. 만약 시끄럽고 자극적인 영화에 지쳐 뭔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찾고 계셨다면, 주저 없이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어요.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14,000년을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요? 아마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