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현실이 너무 팍팍하고 단조롭게 느껴질 때, 차라리 꿈속으로 영원히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해보신 적 없으신가요?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상상력의 날개를 스스로 꺾고 현실의 중력에 순응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바로 그런 우리들의 잊혀진 꿈과 상상력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도 엉뚱한 찬사를 보내는 작품, 미셸 공드리 감독의 ‘수면의 과학’입니다. 이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데요, 마치 누군가의 머릿속을 통째로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랄까요? 기발하고, 사랑스럽고, 때로는 서툴러서 마음 아프기까지 한, 아주 특별한 로맨스 이야기 속으로 함께 떠나볼까 해요.
영화는 멕시코 청년 스테판의 이야기로 시작해요.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새로운 일자리를 위해 파리로 오게 되죠.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그는 자신의 창의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를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달력 회사로 밀어 넣습니다. 상상 속에서는 멋진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아티스트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숫자를 찍어내는 부품일 뿐인 거죠. 이런 답답한 현실의 유일한 탈출구는 바로 그의 ‘꿈’이에요. 스테판은 어릴 때부터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꿈의 세계에 깊이 빠져 사는 인물이거든요. 그의 꿈속에서는 솜으로 만든 구름이 떠다니고, 셀로판지로 만든 강이 흐르며, 골판지로 만든 도시가 펼쳐져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스테판 TV’라는 자신만의 쇼를 진행하는 멋진 주인공이 되기도 한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팍팍한 현실에 한 줄기 빛처럼 새로운 이웃, 스테파니가 등장해요. 자신처럼 무언가를 만들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스테판은 운명처럼 이끌리게 되죠. 스테파니 역시 순수하고 엉뚱한 매력을 가진 스테판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요.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돼요.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은 스테판의 꿈을 더욱 제멋대로 날뛰게 만들고, 그는 점점 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게 됩니다. 꿈속에서 했던 고백을 현실에서도 한 줄 착각하고, 꿈에서 본 장면 때문에 스테파니를 오해하기도 하죠. 그의 서툰 진심과 주체할 수 없는 상상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더라고요. 과연 이 둘의 사랑은 현실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미셸 공드리 감독 특유의 아날로그적인 상상력인 것 같아요. ‘이터널 선샤인’을 보신 분들이라면 익숙하실 텐데, 그의 영화는 CG로 만들어낸 매끈한 판타지가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골판지와 색종이로 뚝딱뚝딱 만들어낸 듯한 핸드메이드 감성으로 가득 차 있어요. 스테판의 꿈속 세상은 최첨단 기술이 아닌, 지극히 손맛이 느껴지는 소품들로 구현되는데, 이게 정말이지 너무나 사랑스러워요. 계란판으로 만든 카메라, 솜뭉치로 표현된 말의 질주, 천으로 만든 자동차 같은 것들이요. 어설퍼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이런 투박함이 스테판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고 순수하게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했어요. 완벽하지 않아서 더 인간적이고, 서툴러서 더 마음이 가는, 그런 느낌이었달까요. 그의 상상력은 세련되진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진실된 감정을 담고 있었던 거죠.
주인공 스테판을 연기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연기는 정말 압권이었어요. 그는 어른의 몸에 갇힌 소년의 모습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표현해냈어요.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순수한 모습부터,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상처받고 떼를 쓰는 미성숙한 모습까지. 관객들은 스테판의 행동에 답답해하다가도, 그의 커다란 눈망울에 담긴 외로움과 불안함을 보면 결국 그를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특히 꿈과 현실을 오가며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표정과 행동은 이 영화가 가진 혼란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가 아니었다면 스테판이라는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사랑스럽고 공감 가게 다가오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상대역인 스테파니를 연기한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죠. 그녀는 스테판의 폭주하는 상상력을 붙잡아주는 현실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해요. 하지만 그녀 역시 스테판 못지않게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인물이죠. 그녀가 만든, 상처 입은 동물들을 표현한 작은 인형들은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내면의 상처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스테판의 판타지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순수함을 알아보고 그에게 끌리는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왔어요.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어색하면서도 미묘한 케미스트리는 이 영화의 로맨스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어요. 완벽하게 딱 들어맞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모난 부분을 조심스럽게 맞춰가려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더라고요.
결국 ‘수면의 과학’은 단순히 독특한 비주얼의 판타지 로맨스가 아니라, ‘소통’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인 것 같아요.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언어와 세계를 가지고 있잖아요. 스테판에게 그것은 ‘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죠. 그는 현실의 언어보다 꿈의 언어가 훨씬 더 편하고 익숙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꿈의 조각들을 현실로 가져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죠. 물론 그 과정은 서툴고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사랑을 위한 가장 필사적인 노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의 서툰 언어를, 그 사람만이 가진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정형화된 할리우드식 로맨스에 조금 질리셨거나, 머릿속을 환기시켜줄 신선한 영화를 찾고 계신다면 ‘수면의 과학’을 강력하게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조금 불친절하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고, 잊고 지냈던 나만의 꿈과 상상력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될지도 몰라요. 때로는 현실의 논리보다 꿈의 비논리가 우리 삶에 더 큰 위로와 영감을 주기도 하니까요. 스테판과 스테파니의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통해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즐거운 꿈을 꾸는 듯한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