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그런 적 없으신가요? 문득 헤어진 연인들이 떠오르면서 ‘내 인생 최악의 이별’ 리스트를 혼자 만들어보는 거요. 유치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쓰라린 실연의 상처를 어떻게든 정리하고 싶을 때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그런 목록을 마음에 품어봤을 것 같아요. 오늘 이야기할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정말이지 지독하게 현실적이고 사랑스러운 작품이에요. 2000년에 나온 영화지만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영화라고 할까요? 음악을 정말 사랑하고, 사랑 때문에 아파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주인공 롭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피식 웃게 될 거라고 장담해요.
영화는 시카고에서 ‘챔피언쉽 비닐’이라는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롭 고든(존 쿠삭)의 이야기로 시작돼요. 그는 음악에 있어서는 거의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수준의 지식을 자랑하는, 소위 ‘음악 덕후’죠. 그의 가게에는 그와 똑 닮은, 음악적 신념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직원 배리(잭 블랙)와 딕(토드 루이소)이 함께하고요. 이들에게 세상은 ‘좋은 음악’과 ‘쓰레기 같은 음악’으로 나뉘고, 그 기준은 아주 확고하죠. 롭의 삶은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그럭저럭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어요. 그의 오랜 연인 로라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요.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충격을 받은 롭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회피하기 위해, 아주 롭다운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합니다. 바로 ‘내 인생을 망친 최악의 이별 Top 5’ 리스트를 작성하는 거죠. 그리고 로라는 당당히 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립니다. 롭은 이 리스트에 오른 과거의 연인들을 직접 찾아가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왜 항상 차이는 쪽이었는지 물어보기로 결심해요. 영화는 바로 이 찌질하고도 용감한 여정을 따라가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리스트 만들기’라는 독특한 설정인 것 같아요. 롭은 모든 것을 리스트로 만들어요. ‘최고의 이별 노래 Top 5’, ‘월요일 아침을 위한 최고의 노래 Top 5’ 등등. 그에게 리스트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자신만의 규칙으로 정리하는 방법이자,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통제하려는 방어기제처럼 보여요. 사실 우리도 그렇잖아요. 불확실한 미래나 정리되지 않는 감정 앞에서 어떻게든 질서를 부여하려고 애쓰죠. 롭의 리스트는 바로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았어요. 특히 ‘최악의 이별 Top 5’는 단순히 과거의 연인들을 순위 매기는 유치한 행동을 넘어, 자신의 실패한 연애사를 복기하며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죠. 하지만 그 여정의 끝에서 그가 마주하게 되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아닐까 싶어요.

주인공 롭을 연기한 존 쿠삭의 연기는 정말이지 최고였어요. 롭은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별로인 남자친구예요. 자기중심적이고, 감정 표현에 서투르며, 진지한 관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다분하죠. 그런데도 신기하게 롭을 미워할 수가 없더라고요. 존 쿠삭은 그런 롭의 찌질함과 유약함,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약간의 순수함과 유머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표현해냈어요. 특히 그가 카메라, 즉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들은 압권이에요. 마치 친한 친구가 술 한잔하면서 자기 연애사를 하소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 덕분에 우리는 롭의 불안하고 흔들리는 내면에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건 존 쿠삭이라는 배우가 가진 특유의 매력 덕분이겠죠.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지만, 완벽한 왕자님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결점 많은 남자’를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정말 인상 깊었어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음악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죠.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는 사실상 음악이 또 다른 주인공인 영화예요. 영화 내내 흐르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밥 딜런, 스티비 원더 같은 명곡들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에요. 각 장면의 분위기를 만들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대변하며, 때로는 그들의 대화 그 자체가 되기도 하죠. 레코드 가게에서 손님의 음악 취향을 놓고 벌이는 롭과 배리의 설전은 정말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들어요. 특히 이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잭 블랙의 에너지는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음악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진, 시끄럽고 오만한 괴짜 점원 배리 역할은 그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가 마지막에 피터 프램튼의 ‘Baby, I Love Your Way’를 열창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유쾌함과 따뜻함을 상징하는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영화를 보고 나면 나만의 ‘최애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싶어지는, 그런 마법 같은 영화랍니다.
롭이 과거의 연인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단순한 추억 여행이 아니에요. 그는 자신이 왜 차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고,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어 했지만, 현실은 그의 기대와 달랐어요. 과거의 그녀들은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었고, 롭과의 기억은 그저 지나간 한때의 일일 뿐이었죠. 이 과정을 통해 롭은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돼요. 문제가 항상 상대방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분명한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미성숙함, 진지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비겁함 같은 것들이요. 이별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던 그가 마침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이 순간이, 롭이라는 인물이 진짜 성장을 시작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사랑도 리콜이 될까?’라는 질문은 결국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더라고요.
이 영화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로맨스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대신, 지극히 현실적인 연애의 민낯을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랑은 언제나 달콤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죠. 때로는 오해하고, 상처 주고, 이기적으로 굴기도 하고요. 롭과 로라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서로를 사랑하지만, 각자의 문제와 불안감 때문에 서로를 힘들게 만들죠. 영화는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를 가리는 대신, 관계란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책임 또한 공동의 것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줘요. 그래서 영화의 결말이 더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위해 노력하려는 롭의 작은 변화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주거든요. 결국 사랑은 완성된 사람들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두 사람이 서로를 통해 함께 성장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혹시 지금 지나간 연애의 상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거나, 현재의 관계에 대해 고민이 많은 분이 있다면 이 영화를 꼭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존 쿠삭의 나지막한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유쾌한 유머와 주옥같은 사운드트랙은 덤이고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는 단순히 헤어진 연인을 되찾는 이야기가 아니라, 흩어져 있던 과거의 조각들을 맞춰보며 비로소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한 남자의 찌질하고도 사랑스러운 성장기랍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을 법한 ‘최악의 이별 Top 5’ 리스트를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영화, 이번 주말에 한번 만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