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상미에 완전히 반했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혼자 있는 주말, 뭘 볼까 고민하다가 이 영화를 선택했습니다. 보는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영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밤 12시가 넘어 있었지만, 후회는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지고, 괜히 마음 한구석이 헛헛해질 때면 문득 생각나는 영화가 있어요. 화려한 볼거리나 극적인 반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고 나면 마치 잘 숙성된 와인 한 잔을 마신 것처럼 마음속에 깊고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 바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사이드웨이‘랍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그 쌉쌀하면서도 따뜻했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한데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길게 풀어볼까 해요.
영화는 정말이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중년 남자의 일주일간의 와이너리 여행을 따라가요. 주인공 마일즈는 이혼의 상처를 안고 사는, 우울하고 예민한 영어 교사예요. 그의 유일한 낙이자 자부심은 바로 ‘와인’이죠. 특히 섬세하고 까다로운 품종인 ‘피노 누아‘에 대한 그의 사랑은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예요. 반면 그의 오랜 친구 잭은 곧 결혼을 앞둔, 한물간 배우인데, 성격은 마일즈와 정반대예요. 언제나 긍정적이고, 유쾌하고, 그리고… 치마만 둘렀다면 일단 작업부터 걸고 보는 심각한 바람둥이죠. 이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잭의 ‘총각파티’를 명목으로 캘리포니아의 산타 바바라 와인 컨트리로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여행의 목적부터가 동상이몽이에요. 마일즈는 오로지 완벽한 와인을 찾아 떠나는 성지 순례 같은 여행을 꿈꾸지만, 잭의 목적은 오직 하나, 결혼 전 마지막으로 뜨거운 추억을 만드는 것이죠. 이 둘의 삐걱거리는 여정은 시작부터 웃음을 자아내요. 마일즈가 와인의 아로마와 부케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할 때, 잭은 그저 빨리 취하고 싶어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식이니까요. 이런 사소한 장면들 속에서 두 캐릭터의 성격과 그들이 처한 삶의 무게가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려져서, 보는 내내 웃으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짠해지더라고요.

이 장면에서 정말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여행에서 두 남자는 각자의 운명 같은 여인들을 만나게 돼요. 마일즈는 와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진 웨이트리스 마야와 교감하게 되고, 잭은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스테파니와 불꽃같은 사랑에 빠지죠. 네 사람이 함께 어울리며 보내는 시간들은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에요. 아름다운 포도밭을 배경으로 와인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모습은 마치 우리 모두가 꿈꾸는 낭만적인 여행의 한 장면 같았어요. 하지만 이 행복한 시간 아래에는 잭이 곧 결혼한다는 불편한 진실과, 마일즈의 마음을 짓누르는 실패의 그림자가 아슬아슬하게 깔려있었죠.
제가 이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이유는 ‘와인’을 통해 인생을 이야기하는 방식 때문이에요. 특히 마야가 피노 누아를 왜 좋아하는지 설명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녀는 피노 누아가 키우기 까다롭고 섬세해서, 인내와 정성을 쏟아야만 비로소 그 잠재력을 드러내는 품종이라고 말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야가 사실은 마일즈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세상의 기준으로는 실패한 루저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누구보다 섬세하고 깊은 내면을 가졌지만 아직 자신의 가치를 활짝 피워내지 못한 마일즈. 그를 알아봐 주는 마야의 말 한마디가 어찌나 따뜻하게 느껴지던지, 제 마음까지 위로받는 기분이었어요. 반면 마일즈가 그토록 경멸하는 ‘멀롯’은 아마도 그가 닮고 싶지 않은, 속물적이고 평범한 세상의 모습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어요.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이지 흠잡을 데가 없어요. 폴 지아마티가 연기하는 마일즈는 정말… 짠내 그 자체예요. 자존감은 낮으면서 와인에 대한 지식으로 어떻게든 자신을 방어하려는 모습, 전 부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끙끙 앓는 모습, 자신의 소설 출간이 거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너져 내리는 모습까지. 그의 모든 표정과 몸짓에는 실패한 중년 남성의 비애가 너무나 현실적으로 담겨 있어서, 보는 사람마저 그의 감정에 푹 빠져들게 만들더라고요. 토마스 헤이든 처치가 연기한 잭 역시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과 현실 도피적인 욕망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져요. 그의 철없는 행동들이 큰 사고로 이어지는 과정들은 폭소를 유발하면서도, 동시에 저렇게라도 현실을 잊고 싶은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가서 씁쓸하기도 했어요.
영화는 결국 이들의 서투른 거짓말이 들통나고, 낭만적인 여행이 엉망진창으로 끝나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요. 마냥 즐겁고 행복한 여행기가 아니라, 인생이 늘 그렇듯 예기치 못한 문제와 마주하고, 상처받고, 또다시 일어서야 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죠. 특히 마일즈가 인생의 역작이라 믿었던 소설의 출간이 완전히 무산되고, 그토록 아끼고 아꼈던 자신의 보물 1호 와인, ‘슈발 블랑 1961년산’을 싸구려 패스트푸드점의 종이컵에 따라 마시는 장면은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최고의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던 완벽한 와인을, 인생 최악의 순간에 허무하게 마셔버리는 그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완벽한 순간이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처럼 다가왔습니다.
결말은 희망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에요. 모든 것이 해결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동화 같은 결말 대신, 영화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마일즈가 용기를 내어 마야의 집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것으로 끝을 맺어요. 그 문이 열릴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하지만 중요한 건, 실패와 절망의 바닥을 딛고 다시 한번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용기를 냈다는 것 아닐까요? ‘사이드웨이’는 우리에게 인생은 피노 누아 와인 같아서, 때로는 떫고 쓰게 느껴지지만 그 안에 숨겨진 복합적인 풍미와 잠재력을 알아봐 줄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다정하게 속삭여주는 영화인 것 같아요. 혹시 삶이 좀 버겁고, 위로가 필요한 날이 온다면, 이 영화와 함께 와인 한 잔 기울여보시길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