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상미에 완전히 반했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너무 피곤했지만, 이 영화만큼은 꼭 보고 싶었습니다. 막상 재생 버튼을 누르니 피곤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느새 영화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더라고요.
며칠 전부터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영화가 한 편 있어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영화요. 바로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 이야기인데요. 단순한 법정 스릴러나 미스터리라고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다면, 영화가 끝날 때쯤엔 아마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들을 가슴에 품게 되실 거예요.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추락’을 다루지만, 동시에 한 부부 관계의 ‘해부’를, 그리고 우리가 믿는 ‘진실‘ 그 자체를 해부대에 올려놓고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더라고요. 그 과정이 너무나도 날카롭고 현실적이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영화는 프랑스 알프스의 고요하고 눈 덮인 산장을 배경으로 시작해요. 성공한 작가인 독일인 ‘산드라’와 역시 작가이지만 남편의 그늘에 가려진 듯한 프랑스인 ‘사뮈엘’, 그리고 시각 장애가 있는 그들의 아들 ‘다니엘’이 이 외딴곳에서 살고 있죠. 평화로워 보이는 이 가족의 일상은 남편 사뮈엘이 다락방 창문에서 떨어져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산산조각이 나요. 단순한 사고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까요? 혹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아내 산드라가 그를 밀어버린 걸까요? 경찰은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산드라는 남편의 살인 용의자로 법정에 서게 됩니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부터, 한 남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동시에, 한 부부가 쌓아 올린 시간과 그 안에 숨겨진 균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비추기 시작했어요.
제가 이 영화에 깊이 빠져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법정’이라는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었어요. 보통의 법정 드라마가 명확한 증거와 증언을 통해 흑과 백을 가리는 데 집중한다면, ‘추락의 해부’의 법정은 오히려 진실을 더 모호하게 만드는 공간으로 작동해요. 검사와 변호사는 부부의 가장 사적인 대화 녹음 파일,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말들, 심지어는 아내 산드라가 쓴 소설의 한 구절까지 증거로 들이밀며 각자의 논리를 펼치죠. 한때는 사랑이었을 감정들이,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어떻게 변질되고 마모되었는지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관객인 저조차도 마치 그들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더라고요. 진실을 찾기 위한 과정이 오히려 그들의 관계를 난도질하는 아이러니,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인 것 같았어요.

영화의 백미는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배우 산드라 휠러의 압도적인 연기가 있어요. 그녀가 연기한 ‘산드라’라는 인물은 정말 복합적이고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캐릭터예요. 남편의 죽음 앞에서 때로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억울함과 슬픔에 무너져 내리죠. 그녀가 결백한 희생자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계획한 영악한 살인자인지 영화는 끝까지 명확한 힌트를 주지 않아요. 관객은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 말투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만 하죠. 특히 프랑스 법정에서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때로는 서툰 프랑스어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그녀의 모습은 언어의 장벽이 어떻게 한 사람을 고립시키고 오해를 낳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더욱 인상 깊었어요. 산드라 휠러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의 밀도는 지금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엄청난 연기였답니다.
산드라 휠러만큼이나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바로 아들 ‘다니엘’을 연기한 아역 배우, 마일로 마차도 그라너였어요. 시각 장애가 있는 다니엘은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일 수 있지만, 그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소리에 의존하죠. 영화는 종종 다니엘의 시점, 혹은 그가 ‘듣는’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해요. 부모님의 격렬한 부부싸움 소리, 아빠가 크게 틀어놓았던 음악 소리, 그리고 그날의 ‘쿵’ 하는 소리까지. 앞이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다른 감각들이 더 예민하게 열려있는 이 아이에게, 부모님의 법정 다툼은 얼마나 큰 혼란과 고통이었을까요. 어른들의 진실 공방 속에서 다니엘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빠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려 해요. 그리고 마침내 법정에서 증언을 해야 하는 순간, 이 어린 소년이 짊어져야 하는 선택의 무게는 스크린을 넘어 제 가슴까지 무겁게 짓누르더라고요. 다니엘의 성장은 이 차가운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한 줄기 희망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영화 초반부터 사뮈엘이 아주 시끄럽게 틀어놓는 스틸 드럼 버전의 ‘P.I.M.P.’라는 곡이 있어요. 이 음악은 처음에는 그냥 부부 갈등의 한 요소처럼 들리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들 관계에 내재된 폭력성과 불협화음을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하더라고요. 고요한 설산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이질적인 음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죠. 반면, 법정 씬에서는 인물들의 숨소리, 작은 기침 소리, 서류 넘어가는 소리까지 극도로 예민하게 들려주면서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지해요. 소리를 이렇게까지 섬세하고 의미심장하게 사용하는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 ‘추락의 해부’는 우리에게 명쾌한 답을 내려주지 않아요. ‘그래서 누가 범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과연 우리는 한 사람을, 혹은 하나의 관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진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믿는 진실이라는 것이 결국은 수많은 파편적인 사실들 속에서 내가 믿고 싶은 이야기를 꿰어 맞춘 결과물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들이요. 영화는 관객을 배심원의 자리에 앉히고, 각자가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판결을 내리도록 만들어요.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과 ‘나는 산드라가 범인인 것 같아’, ‘아니야, 나는 그녀가 무죄라고 생각해’라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죠.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해요.
정리하자면, ‘추락의 해부’는 서늘하고 지적인 매력이 넘치는, 아주 잘 만들어진 심리 드라마이자 법정 스릴러였어요. 151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했고요. 단순한 장르적 쾌감을 넘어, 관계와 진실, 그리고 기억의 본질에 대해 깊이 사유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를 찾고 계신다면, 이 영화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어요. 아마 보고 나시면 저처럼 며칠 동안 이 가족의 이야기에서 헤어 나오기 힘드실 거예요. 그만큼 강렬하고, 또 오랫동안 곱씹게 되는 영화였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