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그런 날이 있는 것 같아요. 낯선 도시의 호텔 창가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반짝이는 야경을 바라보고 싶을 때. 왠지 모를 공허함과 외로움이 훅 밀려올 때, 저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꺼내보곤 한답니다. 이 영화는 화려한 액션이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을 저릿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가졌어요. 처음 봤을 때의 그 몽롱하고 아련한 기분이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더라고요.
영화는 낯선 도시, 도쿄를 배경으로 펼쳐져요. 한때는 잘나가던 할리우드 스타였지만 이제는 위스키 광고를 찍기 위해 일본에 온 중년의 남자 ‘밥'(빌 머레이)과,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왔지만 늘 혼자인 젊은 여자 ‘샬롯'(스칼렛 요한슨). 이 두 사람은 북적이는 도쿄의 한가운데, 똑같은 고급 호텔에 머물면서도 지독한 외로움과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어요. 언어도, 문화도, 심지어는 시차마저도 이들을 이방인으로 만들었죠. 빌 머레이의 그 피곤하고 무기력한 표정,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의 텅 빈 눈빛은 영화 초반부터 이들이 얼마나 ‘길 잃은 영혼’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잠 못 이루던 두 사람은 호텔 바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돼요. 어색한 눈인사로 시작된 만남은, 신기하게도 서로의 외로움을 단번에 알아보는 어떤 ‘교감’으로 이어지더라고요. 세대도, 살아온 환경도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지만, ‘세상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다’는 그 감정 하나로 통했던 거죠. 이들이 함께 도쿄의 밤거리를 헤매고, 시끄러운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르고, 서툰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그래서 더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거창한 로맨스가 아니라, 그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났을 때의 안도감과 위로가 화면 가득 느껴졌거든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도쿄’라는 도시를 단순히 배경으로만 쓰지 않았어요. 영화 속 도쿄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주인공 같아요. 현란한 네온사인과 복잡한 거리 풍경은 오히려 주인공들의 내면적 고립감을 극대화하고, ‘통역되지 않는’ 일본어들은 이들이 겪는 소통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하지만 동시에, 고요한 사찰이나 정갈한 일본식 정원 같은 공간들은 이들이 잠시나마 마음의 평화를 찾는 장소가 되어주기도 해요. 이처럼 도시의 양면적인 모습을 통해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연출이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했어요.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말할 것도 없죠. 빌 머레이는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와 깊은 페이소스를 넘나들며 ‘밥’이라는 캐릭터에 완벽하게 녹아들었어요. 지쳐 보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어딘가 짠한 매력이 있는 아저씨의 모습을 너무나 잘 표현해냈죠. 그리고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스칼렛 요한슨은 갓 결혼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샬롯’의 미묘한 감정들을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연기했어요. 호텔 창가에 걸터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은 이 영화를 상징하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될 거예요.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음악인 것 같아요. 몽환적인 드림팝과 슈게이징 사운드로 가득한 OST는 영화 전반의 나른하고도 아련한 분위기를 완성시켜요. 마치 안개 낀 도쿄의 새벽 공기를 그대로 담아낸 듯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밥과 샬롯의 감정에 푹 빠져들게 되더라고요. 특히 가라오케 씬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들은 캐릭터들의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을 더욱 인상 깊게 만들어 주었답니다.
결말에 대해서는 말을 아낄게요. 그 유명한 마지막 귓속말 장면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죠. 하지만 그 대사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에게 가장 완벽한 ‘통역가’가 되어주었던 두 사람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작은 용기를 얻었다는 사실이니까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단순히 로맨스 영화라기보다는,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모든 이들을 위한 섬세하고 따뜻한 위로에 가까운 영화라고 생각해요. 혹시 오늘 밤 잠 못 이루고 계시다면, 이 영화와 함께 조용한 위로를 받아보는 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