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백미는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요즘 영화 보는 재미가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발견한 작품이었습니다. 기대 없이 봤는데 정말 놀라웠어요. 이래서 영화를 보는구나 싶었습니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할 때가 있어요.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기억, 밤마다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후회스러운 순간들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마치 컴퓨터 파일을 삭제하듯, 내 머릿속의 특정 폴더를 영구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한 번쯤은 해봤을 이 엉뚱하지만 간절한 상상을 스크린 위에 너무나도 아름답고 처절하게 그려낸 영화가 바로 ‘이터널 선샤인’인 것 같아요. 개봉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 영화가 주는 여운과 질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깊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영화는 조엘(짐 캐리)이라는 한 남자의 시점에서 시작돼요. 그는 발렌타인데이에 회사를 무단으로 결근하고, 평소에 가던 길 대신 몬타우크행 기차에 몸을 싣는 충동적인 행동을 하죠. 텅 빈 겨울 해변에서 그는 파란 머리의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을 만나고, 두 사람은 마치 자석처럼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려요. 하지만 이건 이야기의 시작이 아니었어요. 사실 두 사람은 이미 뜨겁게 사랑하고 지독하게 헤어진 연인이었고, 클레멘타인이 먼저 그와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엘 역시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여 그녀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하거든요. 이 영화는 기억을 지우는 그 하룻밤 동안 조엘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따라가는 아주 독특한 여정이에요.
보통 로맨스 영화를 생각하면 달콤하고 예쁜 장면들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터널 선샤인’은 그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인 사랑의 민낯을 보여줘요. 소심하고 내성적인 조엘과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클레멘타인은 정말이지 정반대의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서로의 다름에 매력을 느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다름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죠. 영화는 기억 삭제 과정을 통해 그들이 함께했던 가장 행복한 순간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오해하고, 지쳐갔던 순간들까지도 모두 끄집어내요. 우리가 흔히 ‘지워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들이죠.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조엘은 기억이 하나씩 사라져 갈수록 이별의 아픔마저도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돼요. 클레멘타인을 지워가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거예요.

이 장면을 보고 눈물이 났어요
이 영화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건 미셸 공드리 감독의 연출 방식 때문인 것 같아요.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감독답게, 그는 조엘의 불안정한 기억 속을 그야말로 환상적으로 그려냈어요. 갑자기 배경이 무너지거나, 조엘이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거나,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뭉개지는 장면들은 CG에 의존하기보다는 아날로그적인 기법을 많이 사용해서 더 독특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주더라고요. 기억이 뒤죽박죽 섞이고 왜곡되는 혼란스러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인 저 역시 마치 조엘의 머릿속에 함께 들어가 있는 듯한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되는 거죠. 이건 단순히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감정과 기억의 본질을 시각적으로 탐구하는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 같았어요.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우리에게 코미디 배우로 더 익숙했던 짐 캐리는 이 영화에서 그의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깊고 섬세한 내면 연기를 보여줬어요. 사랑을 잃은 남자의 공허함, 후회, 절망, 그리고 마지막까지 기억을 지키려는 처절함을 그의 슬픈 눈빛 하나로 모두 담아냈죠.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클레멘타인은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캐릭터예요. 시시각각 변하는 머리색처럼 감정의 진폭이 크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 누구보다 솔직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거든요. 이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케미스트리는 불안정하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보는 내내 그들의 사랑에 깊이 몰입할 수밖에 없었어요.
영화는 단순히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의 직원들, 메리(커스틴 던스트)와 하워드 박사의 이야기는 이 영화의 주제를 더 깊게 파고들어요. 메리는 자신이 존경하던 박사와 사랑에 빠졌다가 기억을 지운 경험이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른 채 또다시 그에게 끌리는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이 설정을 통해 영화는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감정이나 끌림까지 사라지는 걸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요. 어쩌면 우리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사랑하고 기억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메리가 라쿠나사의 모든 고객에게 그들의 기억 삭제 기록을 보내버리는 장면은, 상처받을지언정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통쾌하면서도 씁쓸한 순간이었어요.
영화의 마지막, 모든 기억이 지워진 채 다시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의 기억 삭제 사실과, 과거에 서로를 얼마나 끔찍하게 비난했는지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듣게 돼요. 모든 것을 알게 된 클레멘타인은 말하죠. 자신은 또 조엘의 단점을 찾아내고, 관계가 지겨워질지도 모른다고요. 그러자 조엘은 그저 담담하게 ‘괜찮아(Okay)’라고 대답해요. 이 마지막 대사가 ‘이터널 선샤인’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완벽한 사랑은 없고, 상처 없는 관계도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시작해보겠다는 용기. 아픈 기억과 상처까지도 모두 끌어안고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그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요?
결국 이 영화는 우리에게 기억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깊은 질문을 남기는 것 같아요.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 심지어 지우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기억조차도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조각들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어요.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라는 제목은 아름답게 들리지만, 영화는 오히려 그 티끌과 얼룩마저도 우리 삶의 일부이며, 그것들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더욱 다채롭게 빛날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어요. 만약 지금 힘든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있거나, 지나간 인연에 대한 후회로 잠 못 이루는 분이 계시다면, 이 영화를 조심스럽게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아마 큰 위로와 함께, 당신의 기억들을 조금 더 따뜻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시간을 선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