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백미는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친구가 추천해줘서 반신반의하며 본 영화였는데, 완전히 제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시간 동안 계속 생각이 났어요. 이런 영화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가끔 그런 날이 있는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 없이 옛 노래가 귓가에 맴돌고, 잊고 있던 오래된 영화 한 편이 문득 떠오르는 날 말이에요. 며칠 전 제게는 ‘첨밀밀‘이 바로 그런 영화였어요. 등려군의 나른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고, 낯선 도시의 회색빛 풍경 속에서 자전거를 타던 두 남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죠. 1996년 영화니까 벌써 30년 가까이 된 작품인데, 어째서 이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걸까요. 아마도 ‘첨밀밀’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꿈과 현실,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우리 모두의 청춘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영화는 1986년,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건너온 두 젊은이, 여소군(여명)과 이요(장만옥)의 이야기로 시작해요. 성공이라는 막연한 꿈 하나만 품고 홍콩에 도착한 순박한 청년 여소군. 그리고 그보다 먼저 홍콩에 정착해 악착같이 돈을 벌며 자본주의 사회에 완벽히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당찬 아가씨 이요. 두 사람은 낯선 도시의 맥도날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요, 같은 대륙 출신이라는 동질감과 외로움 속에서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죠. 그들의 관계는 처음엔 친구인 듯, 연인인 듯 모호하게 시작돼요. 서로의 등을 내어주며 돈을 인출하고, 함께 노점을 하며 돈을 벌고, 새해 전야에 함께 떨며 핫도그를 나눠 먹는 모습들은 사랑보다 더 애틋한 동지애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두 사람이 꾸는 꿈은 조금씩 달랐던 것 같아요. 여소군에게는 대륙에 두고 온 약혼녀가 있었고, 이요에게는 홍콩에서 부자가 되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늘 ‘거의’ 사랑 이야기(Almost a Love Story)에 머물렀고, 끊임없이 서로를 스쳐 지나가게 되더라고요.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장만옥 배우가 연기한 ‘이요’를 빼놓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녀는 제가 본 가장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로맨스 영화 속 여성 캐릭터 중 한 명이에요.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는 오직 돈과 성공만을 좇는 속물처럼 보이기도 해요. 여소군의 어수룩함을 이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영악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죠.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그녀의 단단한 껍질 아래 숨겨진 연약함과 순정을 발견하게 돼요. 낯선 곳에서 여자 혼자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만 했던 그녀의 절박함이 느껴진달까요. 특히 그녀가 힘들게 모은 돈으로 산 팔찌를 잃어버렸을 때, 그리고 암흑가 보스인 표형(증지위)의 따뜻함에 기대게 될 때,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은 수많은 감정을 담아내고 있었어요. 장만옥이라는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복잡다단한 이요의 감정선을 과연 누가 표현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연기는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반면 여명이 연기한 ‘여소군’은 이요와는 정반대의 인물처럼 보여요. 그는 순수하고, 우직하며, 조금은 세상 물정에 어둡기까지 하죠. 홍콩의 화려함과 속도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늘 고향과 그곳에 있는 약혼녀를 그리워해요. 그런 그에게 이요는 처음으로 홍콩이라는 도시에서 느낀 따스함이자, 동시에 떨쳐낼 수 없는 강렬한 끌림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는 이요와 약혼녀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방황하죠. 어떤 관객들은 여소군의 우유부단함이 답답하다고 말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의 그런 모습이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느꼈어요.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과 새로운 사랑에 대한 설렘, 그리고 오래된 약속에 대한 책임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평범한 한 남자의 모습을 여명 배우는 담백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요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등려군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가장 순수한 순간을 보여주는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아요.

이 장면을 보고 눈물이 났어요
그리고 이 영화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남자가 있죠. 바로 증지위가 연기한 암흑가 보스 ‘표형’이에요. 그는 이요가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나타나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인물인데요, 험상궂은 외모와 직업과는 달리 너무나 순정적이고 낭만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어요.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는 그 유명한 ‘미키마우스 문신’ 장면은 정말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죠. 자신의 험악한 등 때문에 이요가 무서워할까 봐 미키마우스를 그려 넣었다는 그의 고백은, 투박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사랑 고백이었어요. 표형이라는 캐릭터 덕분에 ‘첨밀밀’은 단순한 두 남녀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넘어,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깊이를 갖게 된 것 같아요. 그는 이요에게 안정과 위로를 주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여소군의 자리를 끝내 차지하지는 못했죠. 그의 마지막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프고 아련하게 다가왔어요.
진가신 감독의 연출은 1980년대와 90년대 홍콩의 시대적 분위기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어요. 곧 반환을 앞둔 홍콩의 불안함과 희망이 뒤섞인 공기, 그리고 성공을 위해 발버둥 치는 수많은 이방인들의 고독함이 영화 전체에 짙게 배어있죠. 감독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와 절묘하게 엮어내면서, 그들의 엇갈림이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닌 시대의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바로 등려군의 음악이에요. ‘첨밀밀’과 ‘월량대표아적심‘은 영화의 단순한 배경음악을 넘어, 주인공들의 정체성이자 서로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끈 역할을 해요. 그들이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등려군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두 사람은 같은 추억과 감정을 공유하게 되죠. 음악이 어떻게 영화 서사의 중요한 일부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결국 ‘첨밀밀’은 ‘인연‘에 대한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해요. 홍콩의 비좁은 골목에서, 그리고 뉴욕의 낯선 거리에서 말이죠. 그들의 엇갈림을 보고 있으면 안타깝고 속상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시간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사랑이 더 단단하고 애틋해질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만약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바로 사랑을 이뤘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까요? 수많은 오해와 엇갈림, 그리고 예상치 못한 비극을 모두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서로를 마주하게 된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 큰 울림을 줘요. 등려군의 사망 소식이 흘러나오는 뉴욕의 한 전자제품 가게 쇼윈도 앞에서,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남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하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 순간. 그 어떤 격정적인 재회 장면보다 더 깊고 묵직한 감동이 밀려왔어요. 그것이 바로 운명이 아닐까요.
‘첨밀밀’은 언제 봐도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영화예요. 빛바랜 홍콩 영화의 낭만을 사랑하는 분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믿고 싶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보시길 추천하고 싶어요. 아마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귓가에 맴도는 등려군의 노래와 함께 여소군과 이요의 10년간의 여정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게 될 거예요. 사랑은 때로 꿀처럼 달콤하지만, 그 달콤함은 수많은 엇갈림과 기다림이라는 씁쓸한 시간을 견뎌낸 후에야 비로소 찾아온다는 것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주 담담하고도 아름답게 이야기해주고 있으니까요.





